전설 속 수첩, 스토리를 통해 브랜드로 부활하다

 
 

그렇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책은 몰스킨 외에 거의 없다. 작고 검은 몰스킨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허세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한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똑같이 생긴 유명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이 독창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허세적 소도구라는 것이다. 작고 검은 몰스킨이나 희고 납작한 맥북 같은 것들.” (문구의 모험, 제임스 에드위드, 2015년)

 
 

생각을 기록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해온 필기류, 공책류.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며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대신했으며 사람들은 자연스레 문구 회사들의 후퇴를 예견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시카고트리뷴은 “펜을 포함한 필기류 시장이 2014년 162억 달러(약 18조원) 규모에서 2019년엔 202억 달러(약 22조5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 시장의 선두에 자리한 몰스킨. 역사 속 전설적인 예술가들의 스토리를 통해 아날로그적 감성 그 자체로 성공을 이룩한 브랜드에 귀 기울여보자.

 

예술가들이 쓰던 전설 속의 노트

몰스킨Moleskine은 원래 특정 회사 제품의 상표는 아니었다. 19-20세기, 프랑스 파리의 소규모 제작자들에 의해 손수 만들어진 일반적으로 두루 쓰이던 수첩을 통칭하는 단어였다. 기술의 현대화에 따라 고품질의 문구 제품들이 쏟아져 이 수첩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으나 1997년, 몰스킨은 두 청년들에 의해 재탄생하게 된다. 몰스킨이라는 정식 이름으로 첫 해 5000권을 생산했고 2년 후인 1999년 이탈리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2004년에는 아시아지역에까지 진출하며 땅 속에 잠자고 있던 두더지(mole)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데 성공했다.현대 마케팅의 필수요소인 큐레이션의 개념을 결합하여 단순히 필요에 의한 공유와 렌탈이 아닌 각 고객의 취향에 맞는 적재적소의 상품과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정교한 개인화 플랫폼이 되고 있다.

몰스킨 사무실에 걸린 피카소 사진

몰스킨 사무실에 걸린 피카소 사진

당시 몰스킨을 상품화 한 밀라노의 두 청년 프란세스코 프란체스키Francesco Franceschi와 마리아 세브레곤디Maria Sebregondi는 당시 세계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창조적 계층’이라는 새로운 소비자 그룹에 주목했다. 이 계층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도 그러한 그룹에 속해있었기에 훌륭한 타깃이 될 거라 예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창조적 계층’이라는 특이(?) 타깃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고상하고 까다로운 취향을 지녔고 일반적인 마케팅의 방식으로는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피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몰스킨을 ‘역사를 통해 살려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 작고 검은 수첩을 ‘몰스킨’이라 명명했던 영국의 유명작가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 뿐 아니라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그리고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에 이르는 수많은 예술가과 탐험가,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사랑을 받았다는 몰스킨을 둘러싼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활용하여 ‘예술가들이 사랑한 전설적인 수첩’이라는 코어 브랜드 스토리를 추출해낸것이다.

몰스킨은 누런 종이로 된 소박한 수첩을 통해 마치 이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대한 예술가들이 몰스킨으로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여 자신도 그러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다. 이 까다로운 타깃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수첩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좌) 처음 몰스킨이 언급된 브루스 채트윈의 작품 ‘더 송라인즈The Songlines’우) 유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Karim Rashid의 디자인 노트

좌) 처음 몰스킨이 언급된 브루스 채트윈의 작품 ‘더 송라인즈The Songlines’
우) 유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Karim Rashid의 디자인 노트

 

이야기가 확장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다

몰스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코어스토리를 조금 더 확장시켜 여행과 기억, 경험, 상상의 영역까지 두루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Detour우회로’라는 타이틀의 작품 전시회를 열어 현대의 헤밍웨이나 피카소로 불릴 만한 창조적인 예술가와 사상가들, 이를테면 카림 라시드와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몰스킨 수첩에 적어 넣은 글과 그림을 전시하여 200년 전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몰스킨 수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재와 공존하도록 하였다. 또한 고객들 스스로가 ‘Legendary Artist’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이 자유로이 작품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myMOLESKINE이라는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좌) 몰스킨 전시회에서 제품(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우) 매니아들이 작품을 공유하는 myMolekine 웹페이지

좌) 몰스킨 전시회에서 제품(작품)을 관람하는 관객
우) 매니아들이 작품을 공유하는 myMolekine 웹페이지

제품 라인에서도 이러한 일관성 있는 코어 스토리의 전개는 계속된다. 어린왕자와 스누피 등 고전 작품 속 캐리터 뿐 아니라 스타워즈, 해리포터 등 현대적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매니아들을 위한 에디션을 출판하여 예술/문화와 흐름을 함께하려는 시도는 계속되며 여행용 가방, 컬러 펜, 앨범 등 코어 스토리에 맞추어 제품들을 확장시키고 있다.

 

고객 경험 확장으로 문화 브랜드가 되다

이러한 기조 하에 2016년 7월, 몰스킨은 밀라노에 카페를 오픈했다. “My daily fix of inspiration”이라는 테마로 전개된 이 카페는 프랑스의 문학카페café littéraire를 재해석 한 공간으로 때로는 작업실, 갤러리, 도서관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공간으로 창의성, 숙고의 순간을 위한 에너지를 주는 곳으로 기획되었다. 창작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몰스킨이 추구하는 ‘Inspiring Journeys’를 시작할 수 있는 장소로, 몰스킨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몰스킨의 브랜드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이러한 공간 역시 몰스킨의 창조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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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토막의 스토리가 가진 힘

몰스킨의 CEO Arrigo Berni는 2014년 몰스킨의 정의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크리에이션은 종종 작업실이 아닌 곳에서 발현되며 몰스킨은 이 때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도구이다.” 오늘날 몰스킨은 이렇듯 ‘창조적 도구’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절제된 스토리understated story’을 기반으로 하여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수첩’이라는 상품을 아주 새로운 방법으로 시장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unwritten book'이라는 멋내지 않은 무심한듯한 모양새로 해당 타깃들이 無에서 有를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왔고 그들의 전략은 확실히 작동했다. 사람들은 몰스킨을 스스로를 표현하는 플랫폼으로 인식하였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몰스킨이 '이건 단순한 수첩이 아닙니다.'라고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우리의 머릿속에, 가슴 속에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더 나아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즉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제품의 정보 속에서 상품 자체보다는 상품이 주는 상징적 의미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해 이성을 무력화하고 상품에 호감을 갖게 하고 서로 그 이야기를 공유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토리의 힘이다. 브루스 채트윈의 작품 속 한 구절에서 비롯되어 하나의 ‘문화’를 탄생시킨 이 검고 자그마한 누런 수첩의 전설적 스토리는 미래에도 전설로서 기억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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